닳은 이미지가 얻는 몸
김종길(미술평론가)
김종길(미술평론가)
윤태형의 〈맑은 하늘〉엔 하늘을 가르는 금이 섰다. 푸른 색면의 매끈함을 찢는 선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늘을 보여주던 표면에 생긴 사건이다. 사진은 두 시간을 한 화면에 붙들었다. 인쇄된 맑은 날과 그 인쇄물을 닳게 한 시간. 아름다운 풍경을 보던 눈이 금 가장자리로 옮아간다. 이때 이미지는 어디에 붙어 있었는지가 중요해진다. 상처가 이미지 장소를 되돌려준달까!
〈표면장력〉 연작은 이처럼 도시 이미지에 달라붙은 시간을 읽는다. 광고와 가림막 사진은 소비를 부추기고 미래를 선전한다. 공사 현장의 거친 속살을 매끈한 풍경으로 가리기도 한다. 그러나 비와 먼지, 마찰을 끝없이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뜻을 전달하던 화면에 다른 자국들이 생겨난 까닭이다. 자국은 이미지를 훼손하면서 그 이미지에 물질을 부여한다. 그의 카메라는 그 변화를 가까이 당겼다.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닳음’이 사진 중심을 차지한다.
〈빨간 수박〉의 과육을 가르는 검은 틈은 묘한 통증이다. 먹음직스러움에 파열이 끼어들었잖은가. 〈병〉에서는 흰 띠와 벗겨진 자리들이 윤곽을 가로막는다. 무엇을 팔려던 이미지였는지보다 지금 어떤 상태로 남아 있는지에 눈이 간다. 〈팔분음표들〉의 길게 벌어진 틈은 그려진 음표 곁에 또 다른 리듬을 만든다. 뜻밖에도 선과 색의 관계가 생겼다. 작가는 이 관계를 회화적 구성처럼 포착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거리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이미지를 돌보는 이는 없어도 이미지는 계속 변한다. 비가 닿고 틈이 벌어지는 동안 다른 선들이 자란다. 뜻을 전달하지 못하게 된 곳에 눈이 머물 자리가 생긴 것이다. 유용함이 사라진 표면에서 발견한 이 뜻밖의 여백이 그의 사진 미학이다.
가까이 찍힌 화면에서 이미지와 바탕은 서로 자리를 바꾼다. 배경이던 얼룩이 앞에 나서고 주인공이던 형상이 뒤로 물러난다. 사진 속 사진은 더 이상 온전한 창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닳고 찢어지며 눈앞에 남아 있는 사물이다. 작가노트의 ‘보이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으로의 이동은 이 자리 바꿈에 닿아 있다. 기능을 잃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형상이 열린 것이다. 이처럼 윤태형은 사라져가는 이미지의 마지막 끄트머리를 되살려냈다.